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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책 이야기

단어의 집 / 안희연 산문집 _ 한겨례출판

by 이요상 2021. 12. 16.

서평단을 하다 보면 아차 싶은 책이 있다.

이렇게 두께가 두꺼웠다니, 이렇게 지루할 데가,
때때로 읽다 보니 내 취향과는 전혀 다른 삼천포로 데려간 책도 있었고,

이번에 받아본 책은 전혀 다른 이유로 내 ‘아차’리스트에 오른 책이다.

단어의 집 / 안희연 산문집 _ 한겨례출판



우선 외형을 평가하자면, 그립감이 너무 좋다.

과하지 않은 판형은 데리고 다니기도 편하고, 따뜻한 느낌의 표지가 겨울에 딱이다.

굳이 별칭을 붙이자면 ‘마음의 핫팩’으로 붙이고 싶을 정도,

 

 


게다가 나는 시인이 쓴 에세이를 좋아하는데
김민정 시인의 산문집 ‘각설하고’가 그랬고 이번에 만나게 된 안희연 시인의 ‘단어의 집’도 그랬다.

일상을 이야기 하는 게 산문인데, 시인들의 일상은 전혀 다른 리듬으로 연주된다고 해야할까.

 

 

 

이렇게 요모조모 좋은 책인데도 왜 서평단을 신청한 것을 ‘아차’ 했노라니
다만, 한 번에 읽기가 아까운 책이란 게 문제였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에 두 꼭지만 읽고 싶다. - 사실 페이지가 잘 넘어가, 네다섯 꼭지는 이어 읽게 되지만 – 소설처럼, 인문학이나 지식 서적처럼 차곡차곡 읽거나 호록 읽기에는 책의 결이 너무도 곱다.

 

다정한 말투, 일상을 따뜻하게 보여주는 작가의 창은, 아껴두었던 티백 차처럼,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시간, 볕이 잘 들어오는 시간 식탁을 골라 음미하면서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아껴서, 가능하다면 한 꼭지 한 꼭지 천천히,

 

그렇다고 시집처럼 문장이 다소곳한 것도 아니지만, 뭐랄까, 내가 세상을 보는 속도를 늦추는 느낌이랄까.
꼭지 하나하나가 선물 받은 꽃들처럼, 한꺼번에 모아보기보다는 하루에 한송이씩 보듬어 살펴 보고 싶은 느낌이 드는 책이다.

 


각 꼭지는 (챕터나 목차보다 꼭지라는 말이 어울리는 산문) 하나의 우리말을 표제어로 꺼내고, 그것과 관련된 하루의 일과나 작가의 시선을 보여주는 평범한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탕종’이라는 단어를 따라 유명 베이커리의 식빵을 어렵게 구매한 이야기부터,
‘가시손’이라는 단어를 시작으로 여러 물건들을 파손했던 작가의 경험담을 들을 수 있기도 하다. 

물론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사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천천히 읽게 만드는 힘은 작가의 시선에 있다.

나쁜 것도 조금 틀어서 볼 수 있는 시선, 아쉬운 것도 만족하게 만드는 시선, 때때로 어떤 하루는 기분이 좋지 않아도 그래도 그게 보통의 삶이라고 말해주는 따뜻한 시선 말이다.

 

 

조금씩 읽으며 어떤 꼭지는 표제어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섬세해 단어의 뜻에 집중하기보다는 작가가 묘사하는 하루를 편하게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꼭지들도 있었기 때문에 :)

 

 

서평을 쓰는 지금도 몇 개의 꼭지들은 남겨놓았다. 내일은 금요일이고, 그 다음날은 또 주말이 있어, 그날 그날의 쉼표처럼 단어의 집에 놀러가 쉬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은 마음이다.

 

 


겨울이라 마음이 썰렁하다면, 연말인데 뭐 따뜻한 게 없나 싶은 생각이 든다면,

아주 천천히, 따듯하게 손과 마음에 넣어둘 수 있는 이 핫팩을 권한다.

 

 


다 같은 하루여도, 우리는 조금 더 길게 보낼 수 있다.
평범한 날들이어도 때때로 멈춰 서서 다른 시선으로 숨을 들이마실 수 있다.

 


책을 읽고 나니 작가가 하려던 말은 분명 이 말들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심장모양의 식물이 세상에 존재하듯이 ‘심장 모양의 시’ 라는 것도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런 시에만 붙일 수 있는 학명이 있다면 어떤 어감이 어울릴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솜털이 있는가 가시가 있는가, 혹은 아무것도 없이 매끄러운가에 따라서도 다른 이름이 붙는다. 멀리서 보면 똑같아 보이는 검정이더라도 검은, 새까만, 거무튀튀한, 거무스름한 등 어떤 검음이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부여받는다. 세상 어떤 이름도 함부로 붙여지지 않는구나. 이렇게 다채롭고 세세한 변별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어찌나 풍성하던지.

- 안희연, 단어의 집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