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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책 이야기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_ 요조 산문 「마음산책」

by 이요상 2021. 2. 6.


출판사 마음산책을 알게 된 것은 독서모임의 은비님을 통해서였다. 하얗고 귀여운 은비님은 나를 매우 잘 챙겨주는데, 뻔뻔히도 나는 그녀가 건네는 초대 중 절반을 거절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더불어 나도 (한창 초대 공연을 보러 다닐 때) 매번 그녀를 호출하고 거절당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굳이 우리를 칭하자면 호의와 거절을 핑퐁처럼 주고받는 사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어쨌든 나머지 절반은 수락하는 사이다.

2년 전, 그날도 은비님은 '애정하는 출판사 행사가 있는데 한번 와볼래?'라고 말했고, 무념무상으로 오케이 사인을 한 나는 갑자기 불이 꺼진 작은 강당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때의 기분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엉겁결에, 이건 뭐지, 영화라구?!’였다. 아니 왜 출판사에서 영화를 틀어줘? 하고 볼멘 얼굴로 관람을 시작했지만, 나는 결국 누구보다도 거북이 같은 자세를 하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 <우나기> 포스터



일본의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한국으로 치면 임권택 감독이랄까.)의 책, '우나기선생'을 소개하는 자리였으니 영화 오프닝은 자연스러운 전개였다. 다만 사전정보 없이 (찾아보지 않고) 자리한 나만 매우 놀랐던 것이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는 출판사 직원 한 분이 나와 작가를 소개하고, 봉준호 감독의 추천사를 받게 된 경위를 들려주었는데, 영화는 물론이고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한번씩 꺼내 들여다본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 느낌. 이곳에 찾아온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하다는 듯 건네주었던 인사.


나는 이전에 민음사, 창비, 은행나무 행사에도 갔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페브릭 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었다.
- 민음사는 스웨이드, 창비는 A4, 은행나무는 나일론 느낌이라면, 마음산책이 면 원단이었다. - 



시간이 지나 2020년.

마음산책 북클럽 회원 모집이라는 은비님의 홍보에 넘어가 나역시 그 비밀스럽고 귀여운 클럽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삭막한 스팸메일 속에서 반갑게 열어볼 수 있는 편집자의 편지를 받아보고 있고, 밥벌이와 과장님의 응석받이에 지친 일상에 축배사이다 같은 책 선물도 받아보고 있다.

하지만 마음산책이란 이름답게, 보내준 책들은 다소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작년에는 어째서인지 제대로 책을 읽기 힘들어 (미림 선정도서 읽기에도 허덕였던 작년) 보내주신 선물은 읽는 둥 마는 둥 쌓아놓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는 정말 읽자! 고 마음 먹었고, 마법처럼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이 내 책장 안으로 사뿐히 날아 들어왔다.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_ 요조 산문 「마음산책」

 



작가. 뮤지션 요조는 내 기억 속에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랑의 롤러코스터'를 불렀던 가수. 책을 좋아해서 도서 관련 행사에 객원으로 종종 얼굴을 비친다는 것? + 은행나무의 정유정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무대에 같이 앉아 있던 분. 떡볶이를 좋아한다니 좋은 사람이구나 정도? (아무튼, 떡볶이는 표지가 끌리지 않아 아직 읽지 않았다;)

 

 


처음에는 잘 읽히진 않았다.

매우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는데, 나는 가족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읽으면서 내 가족을 떠올리기 때문인데 (화목한 편인데도) 나는 함께 있는 것이 매우 피로함으로 연결될 때가 많아서, 영화 · 연극 · 도서 등의 좋아하는 것을 접할 때면 가족 이야기는 무조건 빼고 가위로 자르고 밀고, 거절하며 요리조리 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요 책에서는 엄마, 아빠, 라는 표현 대신 부모님의 이름 석 자를 대신해 등장시키고 있다. 아무튼, 이상한 글이었다. 남자친구나 애인이란 호칭 대신 이종수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지칭하기도 하고, 수필이란 자신의 일상을 내밀하게 보여주는 글인데, 사랑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객관화시켜도 되나. 하면서 다른 어떤 가족 이야기보다 편하게 유쾌하게, 사랑스럽게, 짠하게, 미안하게, 다시 뭉클하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제주에서 책방을 하고있는 사장님인 만큼, 책에 관한 이야기도 많았는데, 산문을 읽으며 조금씩 담아놓은 책들이 곧 봄의 장바구니에서 아우성을 치리라는 예감이 든다.

 


- 현재 담아버린 목록


'베누스 푸디카 _박연준 시집' 
'죽은 자의 집 청소 _ 김완'
'아무튼, 떡볶이 _ 요조'
'행복한 고통 _ 김기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_ 김영갑'



읽으면서 좋았던 꼭지를 꼽자면
-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 아름다움은 재미있다.
를 고르고 싶다. 사실 읽는 동안 포스트잇이 없어, 여러 부분에서 책의 귀를 접으려는 충동을 몇 번이나 참아야 했다.

이상도 했다.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너무도 싫은데, 사람에 관한 이야기들이 읽으며 좋은 것은 왜일까. 아니 또, 생각해보면 나는 참 이상한 사람이다. 타인이 나를 못 본 척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매일매일 하면서도 독서모임을 꾸려 모르는 이들에게 굿모닝과 굿나잇 인사를 주고받는 것에 안도를 느끼는 것은 또 무슨 바람일까. -물론 이제 시간이 지나 아는 사람이 됐습니다. :)

 

앞서 읽었던 수필 '턱걸이를 했는데 배가 겁나 당긴다' 와 확연하게 차이를 느꼈는데

턱걸이 책은 상황보다 자신의 느낌을 주로 말해 나에게 무언가를 느낄 여지를 주지 않은 것과 달리, 요조의 산문은 감정에 너무 치우치지 않아 오히려 내 감정을 더 들여다보고 옆에도 놔보고, 나라면, 하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는 점이었다.

 

 

 

+ 읽으면서 김민정 시인의 '각설하고'를 떠올리기도 했다.

 

각설하고, _ 김민정 「한겨례 출판」


결은 조금도 같지 않았다. 문체도, 소재도,
하지만 읽는 동안 감정이 움직이는 시간을 선물 받은 느낌. 그 점이 꼭 같았다.

 

 

 


책을 다 덮고 나니 지하철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내가 내릴 시간에 맞추어 마지막 페이지가 끝난 것 같았다. 나는 책을 덮고, 오래도록 메고 다닌 회색 백팩을 멘 뒤, 2월의 저녁 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엊그제 내린 눈이 다 녹았구나. 횡단보도는 바짝 다 말랐구나.
제주에 살고 있는 작가 신수진씨는 책을 팔고 있겠지. 나라면 종일 화가 나는 일이 되었을 – 택배 부치러 우체국 갔다가  연락처 누락으로 DM 오길 마냥 기다림- 같은 사건들도 소중한 하루로 챙겨 행복하게 지내고 있겠지. 제주는 따뜻할 거야. 달리기 좋은 공기일지도 몰라. 나도 이참에 일주일에 하루는 고기를 먹지 말아볼까. 하는 생각들을 하며 걸을 수 있었다.

 



이 한권은, 어쩌면 그녀가 의연하게 부르는 노랫말 같다. 

완벽하지 않은 날들도, 실패한 나도, 부디 사랑하라고.

 

 

 

리뷰를 쓰며, 나는 그녀의 노래인 '모과나무'를 듣는다. 

 


'어디선가 날아오는
오래전 내가 주문했던 소원

멈추지 말고 계속 달려나가야지요
떠미는 바람의 마음도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것 같은 밤이다.




* 글을 쓸 때 ‘것 같다’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들 하지만,
나는 세상을 확신하기엔 아직 모자란 어른이다.